툽텐 진파 봉은사 강의 “깨달음은 마음 정화하고 바라밀 실현하는 것”
2024 국제선명상대회 봉은사 선명상축제
9월29일, 봉은사에서 툽텐 진파 초청해 개최
‘두려움 없는 마음-자비 꽃피우다' 주제 강연
한국불교의 선(禪)명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2024 국제선명상대회 불교도대법회’가 9월28일 광화문 일대에서 원만하게 봉행한 가운데, 9월29일 서울 봉은사에서도 해외 선명상지도자와 국내 선명상 지도자가 강연을 이어갔다.
조계종(총무원장 진우스님)은 9월29일 오후3시 봉은사 보우당에서 ‘2024 국제선명상대회-봉은사 선명상축제’를 사부대중 300여 명이 동참한 가운데 달라이라마의 영어통역자로 40여 년 활동한 툽텐 진파(Thupten Jinpa) 박사를 초청해 ‘두려움 없는 마음, 자비를 꽃피우다’라는 주제로 강연과 질의응답을 펼쳤다. 이어 중앙승가대학교 교수인 금강스님이 ‘나를 위한 자비명상’이라는 주제의 강연과 실참이 진행됐다.
강연에 앞서 봉은사 주지 원명스님은 인사말에서 “봉은사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상가인 툽텐 진파 박사를 초대해 귀중한 자리를 만들었다”며 “이런 의미있는 자리에서 유익한 가르침을 얻어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중앙종회의장 주경스님도 축사를 통해 “부처님 말씀에 분노와 상대방에 대한 탐욕에 의한 두 번째 화살을 맞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를 막아주는 게 선명상이라 생각한다”며 “오늘 좋은 말씀 귀중한 말씀을 듣고 삶의 자양분을 만들길 바란다”고 말했다.
강연에 나선 툽텐 진파는 “깨달음이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마음을 정화하는 바라밀을 실현하는 것”이라며 “부처님 당시부터 불교의 방점은 나의 마음을 알고 다루는 것이었다”고 법좌를 폈다.
툽텐 진파는 “달라이라마 존자를 모시는 일을 전 세계에 다니며 통역을 37년 했는데 그분은 언제나 평안했다는데 그것의 원천은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푸는 삶을 실제적으로 만들라는 가르침을 현실에 실천하고 다짐한 것에 있었다고 본다”며 “여기 도반과 대덕스님들이 계시는데 드리고 싶은 말은 자비에 천착(穿鑿)하시고 등불, 횃불처럼 삼아 체화해서 일상적 삶에 기대(의지하라)시라”고 당부했다.
다르마(法)의 5가지 속성을 제시한 툽텐 진파는 △부처님 가르침은 진실하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 실망하지 않는다 △감각으로부터 제어로 덜 집착하게 한다 △우리마음을 힘겹게 하는 생각이나 감정으로 편안하게 가라앉혀 명상수행과 관련 있는데 사마타나 위빠사나와 관계해 지혜를 결합한다 △자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9월28일 광화문에서의 국제선명상대회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밝힌 툽텐 진파는 “대승불교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열심히 정전하는 것인데 기쁨 속에서 하는 것”이라며 “선명상대회에서 5분 명상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이로운 지를 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툽텐 진파 강연 요지
함께 해 주신 여러 대덕스님들과 법(法)의 형제자매님들께 감사드린다. 이 자리에 함께 해서 마음이 겸허해 지고 행복하다. 한국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 처음 인상적이었던 것은 도시를 감싸고 있는 녹지였고, 수행하는 스님들이 대단히 많았다는 것이다. 조계종단의 규모나 조직이 방대하고 조직도 잘 돼 있고 불법을 전하는 좋은 수레가 될 것이라 본다. 또 놀라운 것은 미래를 지향하는 총무원장 스님의 미전이었다. 아시겠지만 저는 티베트 사람이고 망명정부의 아들이고 인도에서 자랐다. 저희들은 달라이라마 존자님의 지도와 정신적인 뒷받침 아래 미래불교를 가져오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달라이라마 존자께서는 스님들도 과학적 사유를 만나길 원했고, 재가자도 믿음뿐만 아니라 이해를 바탕으로 불교를 알릴려고 노력했다. 서양에서도 불교가 대중화의 흐름을 타고 있는데 동양의 전통적인 불교와는 다르다. 서양에서 불교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자가 아니다. 그들은 불교 가운데 자기 삶에 적용하는 것을 찾기 위해 불교를 접한다. 그래서 개인의 삶과 관련이 깊다. 원하는 것을 고른다. 거기에는 아주 긍정적 측면이 있다는데 일상적인 삶에 적용할 수 있는 일상적인 가르침의 가치를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호흡을 통해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마음챙김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운다. 그러한 마음을 알아차리고 다스린다. 점점 더 자신을 이해하고 많은 사람들이 자비와 같은 자질을 일구는데 관심을 가지게 됐다. 사람들이 찾고 있는 것은 더 많은 평화, 더 고요함, 스트레스 덜 받아 일상에서의 평화를 누리는 것이다.
전통불교 맥락에서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보시 등의 신행에 치우쳐 있다. 뭔가 불법을 잘 이해하고 깨우치는 것은 스님들의 몫이고, 재가자는 종단을 외호하는 역할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수 세기동안 이런 접근은 통했지만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옛날에는 전통이 중요했다. 사회가 점점 현대화되고 개인주의화하면서 충성스런 깊은 마음이 중요한 게 아니게 됐다.
요즘과 같은 현대적인 맥락에서 각자 개인들이 재가자들은 각자 개인들이 불법 안에서 삶의 목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다르마(法)가 실제적인 삶에서 적용되어야 한다. 이것이 달라이라마 존자가 말씀하시는 21세기 불교이자 불자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한국 전통불교의 깊은 신심과 이해가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불법의 이해는 개인적인 실제적인 경험이 바탕으로 되어 있어야 한다다. 예를 들어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사랑하는 이들이 떠났다거나 이별한다거나 할 때 불법으로부터 이로움을 얻었다면 불법으로 헤쳐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굉장히 풍요로운데 그 안에 많은 명상 등이 있는데 그것은 신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연 깨달음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면 마음을 정화하는 것이고 바라밀을 실현하는 것이다. 불교에는 다른 종교보다 깊은 수행전통과 불교심리학의 전통이 있다. 부처님 당시부터 불교의 방점은 나의 마음을 아는 것이었고 다루는 것이었다. 종회의장 스님이 두 번째 화살의 비유를 말했는데 두 번째 화살이 가리키는 것은 우리 각각의 사람들이 고난을 만났을 때 즉각 반응할까 아니면 지혜롭게 대응할 것인가다.
인간의 몸으로 산다는 것, 즉 존재한다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고통이 없는 이는 없다. 완전히 깨달으면 모르지만 말이다.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보호받을 수는 없다. 고통으로부터 보호하려 할 때 잘 작동하지 않는데 원인을 모르기 때문이다. 고통의 대부분은 통제할 수 있는 조건 밖에 있다.
8세기 인도의 스승은 고통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려는 것은 가시밭길 걸으면서 한번도 밟지 않고 온 세상을 가죽으로 씌우려 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세상을 다 가죽으로 덮지 말고 내 발바닥만 가죽으로 덮어도 가시밭길을 걷는 일은 없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비밀이다.
어떻게 세상을 바꿀까가 내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우리 모두는 역경에 직면하지만 차이를 만드는 것은 그것에 대해 어떻게 응답하느냐이다. 현대인은 매일 스트레스에 싸여 산다. 스트레스는 도전에 직면한 인간의 자연스런 반응이다. 반응으로서의 스트레스는 긍적적인 거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험에 직면해 몸에 화학적인 요소가 분비가 되면서 위험상황에 대처하게 한다. 예를 들면 어떤 동물이 사자에 쫓기고 있을 때 스트레스를 받고 호르몬을 분비해 상황에 대처할 수 있게 한다. 동물들은 그런 시간이 지나면 스트레스를 잊어버리는데 인간은 사자가 떠나도 스트레스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고통을 더 증폭시키고 과장하고 계속되게 하는 것은 두 번째 화살이다. 인간의 마음이다. 우리 마음이 스트레스 받고 상황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면 설령 잘 살려고 하는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했다고해도 그렇게 살기는 힘들다.
불교명상의 가르침이 여기에서 중요한데, 마음을 이완하게 하고, 알아차리게 하고, 현재의 순간으로 돌아오게 한다. 예를들어 10대 자녀가 있어 힘든 상황이 오면, (반항적으로) 맞받아치며 말하면 화가 나는데 명상하는 사람이라면 즉각적으로 알아차리고 그것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게 아니라 깊은 숨을 들이 쉰 다음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날 수 있다.
그런 식의 즉각적 반응은 서로 부닥칠 뿐이고 부정적인 에너지가 증폭되는데 한 걸음 물러나서 지금 이순 간 숨에 깃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선(禪)의 공안(화두) 가운데 한 손바닥으로 치는 손뼉이라는 공안이 있다. 한 손바닥으로 손뼉을 칠 수는 없다. 그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들이 다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주위를 기울이게 하고 삶을 알아차리게 하는데 이게 다 다르마(法)이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마치 사람들이 다르마는 미래에 생기는 것처럼 여기는데 그게 아니고 지금 여기에 문제를 바라보고 반응하는 것이다.
부처님 자신은 불법을 약(藥)에 비유했다. 그것은 마음을 겨냥한 약이다. 정신적인 웰빙, 즉 건강을 위해 불법을 잘 사용하는 방법은 좋지 않는 것을 미리부터 막아내는 것이다. 마음의 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알아차림을 가져오게 하고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 멈출 수 있게 하고, 그럼으로서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내 주변과 세상에 더 나은 방식으로 관계를 할 수 공간이 될 수 있게 해 준다.
개인의 일은 비종교적인 맥락의 자기를 가져온다. 한국에서 꽃피어난 불교는 대승불교다. 대승불교의 핵심은 지혜와 자비의 결합이다. 이는 모든 대승불교의 꽃인데 <반야심경> 안에 핵심이 적확하게 들어가 있다. <반야심경>은 사리불과 관자재보살의 대화로 이뤄 있다.
자비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특히 오늘날 매우 중요하다. 반대로 지혜라는 것은 조금 더 어렵고 복잡하다. 공성(空性)도 이해해야 하고 명상수행도 상당히 필요로 한다. 상대적으로 자비는 훨씬 이해하기 쉽다. 불교문화 전반에 관한 부처님의 전생담인 <자타카> 이야기는 사람들이 존경하는 대상이다. 부처님 전생담의 핵심은 다 부처님이 자비롭게 행하셨는가로 이루어져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서원을 세우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 보살의 서원을 기뻐만 하지 않고 모두가 직접 받고 행해 나간다.
대승불교에서는 특정한 마음을 일군다고 할 때 자비가 핵심이다. 자비는 모든 위대한 자질의 어머니와 같다고 한다. 부처님께 바치는 경전내용 중 이런 게 있다. 부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때 내 손바닥 안에 하나 자질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모든 고귀한 자질을 가질 수 있는 게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그것은 자비라고 했다.
여기에서 아름다움 점은, 자비라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경탄하고 깊이 마음에 아로새기는 것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일굴 수 있는 수행이라는 점이다. 대승불교에서 깨달음의 이상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밖에서부터 오는 게 아니라 우리 안에서 있는 선한 씨앗을 키워서 이루는데 있다. 그것의 기반이 되는 사상은 우리 모두가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고통 받는 이를 보면 자연스럽게 공감한다. 굳이 학습하지 않아도 안다. 자연스런 반응이기에 극심한 고통을 겪는 이가 있다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것(공감)과 연결될 수 있다.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거나 관계가 좋지 않다면 그 공감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도 있다. 그러나 공감의 마음은 이미 마음 안에 다 있는 것이기 때문에 관여할 수도 있다.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을 허락하면 이해할 수 있고, 정서적으로 마음이 움직인다. 기꺼이 뭔가를 하려 하는데 아주 자연스런 반응이다. 누구나 그렇게 된다. 그렇게 느끼고 있는 상태에 있을 때는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마음(아젠다)이 다 가 사라지고 상대에게 마음이 가는데 그게 자비다. 아주 자연스런 인간의 자질이다. 자비의 발현은 (상황을 적극적으로) 일구느냐, 반응이 일어나도록 상황을 남겨두느냐에 있다. 우리(중생)의 자비는 바로 앞에 있는 상황에서만 발현되는데 부처님 자비는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언제나 있다는 거다.
오늘날에는 자비에 대해 과학적인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는데 자비를 많이 가질수록 더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자비는 누군가의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고 다가가는 것인데 다가가면 고통이 두 배가 될 같은데 왜 행복해지는 걸까? 어떻게 보면 역설이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 안의 자비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면 초점을 맞추는 것으로부터 속박에 벗어나 자유롭게 해 준다는 것이다. 우리 스트레스 대부분은 우리 자신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을 더 많이 열면 열수록 더 많은 공간이 열린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상황에 의식적으로 응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비가 개인의 웰빙(건강)에 도움되는 또다른 이유는 또 다른 존재와 연결이 가능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외로움과는 정반대의 것인데 외로움은 사실 만인의 또다른 고통의 원천이기도 하다. 우리 안에 자비를 표현하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 삶의 목적이 실현된다. 우리는 어떤상황이나 도전이 되는 것에 직면하면 하나의 방식으로 대응할 것인데 두려움과 화남으로 반응할 수 있고, 그 순간 자비를 우리의 동기로 선택하면 큰 차이가 난다. 여기서 하려 하는 것은 다른 세상에서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 말은 현실에 눈을 감는 게 아니다. 자비를 선택하는 것은 다른 이의 휴머니티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상호작용하는 이의 안녕과 이익을 늘 마음에 새긴다는 것이다. 달라이라마 존자는 자비를 선택하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이고, 다른 이와 연결되기 쉽다고 했다. 그것은 또한 상황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고 했다. 예를 들어 직장동료와 힘든 관계에 처하게 되었을 때 걱정하고 혼란스러울 수 있다. 그때 이 상황을 명징하게 할 수 있는 질문은 ‘내가 이사람을 돕기 위해 가장 자비로운 게 무엇인가?’이다.
자비를 선택한다는 것은 용기를 갖는 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확신을 갖게 됨으로써 나 자신의 이러저러한 인생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존재가 투명해진다는 거다. 숨길 게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용기있게 뭔가를 한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 자비가 가지고 있는 핵심적인 지혜는 내 앞의 사람은 나와 같다는 것이다.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바라지 않는다는 거다. 자비를 선택하지 않고 두려움이나 화남에 계속 빠져 있으면 결코 행복하지 않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고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에 머물게 된다.
불교의 가르침에 의지하면, 자비에 의지하면 다른 모든 존재가 고통 받고 있듯이 ‘이게 무슨 대수인가’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진정한 자비를 일구면 편안해지고 용기를 갖게 되고, 만족하고 기쁘게 된다. 서양에서 비유가 있는데 하루를 끝내고 거울을 보면서 “참 행복하다’고 하는 거다. 자비가 모든 문제를 다 다 해결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비적인 안목에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맺고 있는 우리 삶의 관계도 조화롭게 해 준다.
저는 달라이라마 존자를 모시는 일을 전 세계에 다니며 통역을 37년 했는데 그분은 언제나 평안했다. 유명한 정치지도자를 만나고 다양한 분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정신이 없었는데 존자님은 늘 평안했다. 존자님은 세상에서 가장 기쁜 존재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것의 원천은 부처님께서 자비를 베푸는 삶을 실제적으로 만들라는 현실을 실천하고 다짐한 것에 있었다고 본다. 제가 여기 계시는 도반과 대덕스님들께 드리고 싶은 말은 자비에 천착(穿鑿)하시고 등불, 횃불처럼 삼아서 체화해서 일상적 삶에 기대(의지하라)시라는 것이다.
저는 25년 간 스님이었는데 지금은 두 딸을 둔 아버지이고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으로 일반적인 사람과 겪는 일을 맞닥뜨린다. 세금도 다 내야 되고 계산서도 다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기쁨과 행복 누리고 사는 것은 불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일과 열정은 티베트 불교의 고전적인 저술의 번역이지만 한쪽에서는 달라이라마 모시고 자비를 파악하고 현대인에게 전하는 것인데 과학으로 더욱 꽃피우고 있다.
앞에서 말씀드린 핵심에는 법에 의지하면 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대게 마음에서 오는 문제이다. 병은 약으로 다스릴 수 있지만 마음의 문제는 법에 의해 다스리면 된다. 우리가 맞닥뜨리는 여러 문제는 두 번째 화살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니 피할 수 있다. 불교문화가 있는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은 너무나 행운이고 특권이니 최대한 잘 살려서 불교의 가르침을 체화해 때론 스승에게 물어보기도 하지만 스스로 배워서 삶에 적용하기길 바란다. 법의 힘과 부처님의 가르침의 힘을 진정으로 만드는 것은 실제 수행하고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때다.
달라이라마께 누가 질문을 했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2500년 전 가르침인데 오늘날 어떻게 유효 적절할 것인가요?”였다. 존자께서는 “2500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인간은 그대로고 문제도 그대로다. 생로병사도 미움도 질투도 똑같아 부처님의 가르침은 살아가는데 유효적절하다”고 했다. 존자님께서는 과학의 사유를 빌려서 인의 뇌의 사유도 구조도 여전히 똑같다고 했다. 만일 미래에 인간의 뇌구조가 달라지면 다른 이야기가 될 거다.
저는 티베트인이고, 티베트 젊은이들에게 불법을 가르쳐야 했는데 슬프게 생각하는 것은 이들 젊은이들이 아름다운 것(佛法)에 깃든 가르침을 잘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통역자가 잠시 감정 격해 울먹임. 티베트 망명정부의 애환을 느낀 것으로 생각됨) 전통 불교국가의 많은 젊은이들도 똑같을 것 같다. 이 불법의 보석을 만날 수 없었고, 접해도 조금 접했던 것 같다. 만일 불법에 있는 수승한 가치(가르침)을 알았고 깊이 인식했다면 그들이 맞닥뜨렸던 그토록 많은 고통을 일찍부터 겪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과학의 시대에도 지혜에 대해서 같은 이야기를 한다. 나라고 하는 존재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존재임을 알 때 더 삶은 더 의미 있어지고 행복해진다. 개인이라는 것에 갖혀 있게 되면 덜 행복하다. 의미 있는 삶을 살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는 어떤 것을 선택해서 사느냐에 달려 잇다. 삶은 무상하긴 하지만 불법 안에 깃들면 외롭지 않다.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불법의 공동체 안에 머물면 외롭지 않다. 그렇게 살면 의미와 간직하는 삶과 연결해서 살 수 있다. 이 자리에 대덕 스님들이 계시는데 젊은 세대들에게 다가가는 불법을 찾아 전해 주길 바란다.
또 중요한 것은 지금 당장 일상의 삶에서 젊은이들이 배워서 적용하는 길을 찾아 주라는 것이다. 그냥 단지 2분, 5분의 호흡명상으로 마음이 고요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어제 광화문에서 다같이 3만명 대중이 하나의 숨결로 고요함을 경험했는데 그것에 감명받은 힘을 똑같이 느꼈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평화가 어느정도인가는 내면에 달려 있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가져다 주지 않는다.
만일 젊은이들에게 호흡(명상)을 통해 복잡한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다면 “평화롭다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하는 것을 알게 해줄 거다. 그런 고요함으로 가는 것을 맛보게 하면 필요한 순간 어디에 의지해야 하는 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상업적인 언어로 표현하면 “아! 이렇게 마음이 고요하면 보상이 있구나”하고 기꺼이 따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옛날 불교수행자들은 열심히 수행을 해서 내생에 극락에 태어남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육도 가운데 낮은 곳에 태어남으로 충분했을 것인데 지금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젊은 세대들에게 다르마(Dharma)의 힘을 알려 줄 수 있는 단순한 방법 중의 하나는 ‘정서적인 알아차림’이다. 그러면 화를 내지 않고 ‘물러남’을 알게 된다. 서양에서 많이 가르치고 있으니 한국에서도 가능하다고 본다.
자비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부처님의 가르침에는 자비만 있는 게 아니고 더 있다. 고대문헌에서 인용하고 싶은 게 있는데 거기에는 불법에는 다섯 가지 덕이 있다고 한다. 이는 부처님께서 법을 펼쳐 주심에 대한 찬탄인데 다르마(法)의 5가지 속성을 말하고 있다.
첫째는 부처님 가르침은 진실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 절대 실망하지 않는다. 세 번째 속성은 감각으로부터 제어로 덜 집착하게 한다는 가르침이다. 물질세계에 좋은 것이 많아 마음이 가는데 감각을 잘 단속해서 그렇지 않게 하는 거다. 넷째는 우리마음을 힘겹게 하는 생각이나 감정으로 편안하게 가라앉히힌다. 우리 문제의 많은 것들은 혼란한 생각이나 관념에서 오기 때문이다. 네 번째 속성은 명상수행과 관련 있는데 사마타나 위빠사나와 관계해 지혜를 결합한다.
마지막 다섯 번째 속성은 자비다. 불교 가르침의 핵심은 마음을 닦아 자비심을 내는 것이고 지혜를 일구어 증장시켜 얻는 것도 있다. 자비와 지혜 이 두 가지다. 다르마에 진정으로 참여하는 것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깃들어야 한다. 법에 대한 이해를 머리 차원에서 가슴 차원으로 가져오는 게 명상이고 수행이다.
다른말로 하자면 법에 대한 이해를 나의 자질로 통합해야 한다는 말이다. 처음의 접근은 의식적이고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거다. 수행을 점점 해 나가다 보면 결국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신체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대승의 수행자로 할 수 있는 첫 번째는 자비와 지혜의 가치에 대해 깊이 성찰하는 것이다.자비와 지혜를 찬탄하는 마음이 가슴속에 있어야 한다. 대승의 많은 저술들은 자비와 지혜의 찬탄으로 시작한다.
거기에 깃들어 있는 심리학은 모든 현대사회에 작동한다. 그 다음은 의도를 설정하는 것이다. 의도에는 선택이 있고 컨트롤 할 수 있다. 자비와 지혜가 내 삶의 의도가 되게 하는데 특히 자비가 중요하다. 일상의 삶에서는 할 수 있는 만큼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래서 삶과 세상을 접할 때 자비와 지혜를 가져와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최소 매일 2애서 5분간 고요한 수행을 슬로운 다운(Slow Down)으로 했으면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호흡일 거라 본다. 호흡이라는 게 묘한 것이 몸에 관한 것과 마음에 관한 언저리에 있다는 것이다. 호흡은 애쓰지 않아도 되는 자연스런 것이다. 호흡에 주의를 기울이고 호흡에 깃들어 쉬면서 고요함을 가져올 수 있다. 이런 수행을 계속하면 도전적 삶에 직면할 때 적용할 수 있다. 설령 삶에 최선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알아차림이 없으면 의도대로 잘 살 수 없다. 특히 도전적인 상황에 직면했을 때는 자비를 의도적으로 선택을 해야 한다. 도적적인 상황이 끝났을 때는 다음으로 쓱 가지말고 그 상황을 돌아보길 바란다.
이렇게 함으로써 단계에 참여해 패턴을 만들 수 있다. 하루를 마감할 때는 짧게라도 하루의 삶을 돌아보는 게 중요하다. 아침의 의도와 저녁의 마무리가 연결된다. 그것에 기뻐하는 게 중요하다. 좋은 동기를 가졌어도 지속하게 하는 것은 기쁨이기 때문이다.
대승불교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열심히 정전하는 것인데 기쁨 속에서 하는 것이다.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자비와 지혜가 얼마나 가치 있는 지를 깊이 인식하고, 자신의 의도를 깊이 설정하고, 마음을 고요하고 평안하게 하는 구체적 방법을 배우고, 자비의 의도를 일상의 삶 속에서 유지하고, 하루의 끝에서 그것을 돌아보고, 내가 한 자비로운 실천을 기뻐하는 것이다.
오늘이 새로운 접근을 시작하기 좋은 날이라 본다. 왜냐하면 어제 선명상대회에서 5분 명상으로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글로 적으면서 하루나 며칠이 지나가는 모습을 느껴 보길 바란다. 그것이 얼마나 이로운 지를 알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진심으로 찬탄하고 숭배(숭모)하는 분들이라면 여러분들이 모델이 되어야 한다. 부처님 가르침을 체화해 살면 법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아름다운 길이다.
저는 불자로서 불법(佛法)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행복을 위한 원천이라는 것은 강력하게 믿는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지혜를 나누 모든 활동은 모든 존재의 이익을 위함이다. 그것은 불자수를 늘이는 게 아니다. 불자이든 아니든 불법의 이로움은 모든 이에게 미칠 수 있다. 부처님이 설한 것이 단 한 가지가 있다면 모든 고통과 고통을 소멸하는 것이었다. 나와 우리 가족 안위만 생각해도 좋은 삶이지만, 타인을 위한 삶은 산다면 더욱 풍요로운 삶일 될 것이다. 대승불교의 목적은 모든 존재의 고통을 여의고, 소멸하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 질의와 응답
-호흡을 따라 명상하다 보면 생각이 꼬리를 물고 유체이탈을 한다. 그것을 겪은 뒤 어떻게 정진해야 할까?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명상 수행에서 강조하는 게 있는데 몸과 정신을 분리하지 않는 것이다. 사념처 수행도 몸의 관찰을 잘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유체이탈이 안 일어날 것이다. 호흡을 닻처럼 만들어서 수행하도록 하는 방법을 배우길 바란다. 움직임이 있는 명상도 도움이 될다.
-사람은 몸과 마음 두 가지 요소로 되어 있어 서로 영향주고 받는다. 좋은 수행이란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인데 불교는 마음 닦는 수행은 뛰어난데 몸 닦는 수행 소홀한 것 같은데 어떤 생각인가?
=불교의 가르침은 광대하다. 2600년 동안의 가르침이다. 불교 안에는 다양성이 있다. 인도의 아미달마와 상좌부 불교도 있다. 아미달마에는 마음 다스리는 세부적인 내용이 많다. 상좌부 불교에는 마음을 설명할 때 몸과 관련된 내용이 많다. 금강승 불교로 가면 몸에 바탕을 둔 수행법이 많다. 불교는 일반적으로 마음의 문제를 많이 다룬다. 고통과 웰빙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마음은 세상과 관계를 맺는 관문이다. 세상으로 가는 관문을 지키고 있으면 부닥치는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마음을 다룬다는 게 더 강력하다고 본다.
-항상 마음이 만법이라 했는데 저는 마음을 자연의 무정설법으로 이끌고 다스린다. 바람소리, 꽃 색깔, 물속의 자갈이 빛나는 것에 환희심을 느끼는데 이것도 바람직한 명상이 될 수 있는가?
=말씀하신 수행은 현대인들이 많이 하는 수행이다. 걷는다든지 하면 내면이 고요해진다. 자연을 관찰하는 알아차림도 좋은 수행이다. 대부분 명상은 슬로우 다운(Slow Down)이다. 이는 생각을 잦아들게 한다. 생각에는 에너지가 있어 잦아들게 해야 한다. 곱씹지 않게 해야 한다. 생각을 그치고, 주위(신체)의 호흡을 가져오면 수행에 도움이 된다.
■ 툽텐 진파는…
美 스텐퍼드 의대 자비명상 프로그램 핵심 개발자
툽텐 진파(Thupten Jinpa)는 40년 가까이 달라이라마의 영어 통역자로 활동하며 그의 가르침을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달라이라마의 수많은 저서 작업과 번역에도 함께 참여했다. 툽텐 진파는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걸었던 스님 출신의 명상 지도자이다.
티베트 불교학의 중심지 간덴 사원의 불교대학에서 정진하며 불교교학 박사에 해당하는 게쉐학위를 받았다. 이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종교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 같은 경험을 바탕으로 툽텐 진파는 2009년 미국 스탠퍼드 의과대학의 ‘자비와 이타주의 연구 교육 센터(CCARE)’에서 개발한 자비 명상 프로그램인 CCT(Compassion Cultivation Training)에 핵심 개발자로 참여했다.
그는 또 마인드&라이프(Mind & Life) 연구소 의장을 맡아 서양 과학과 불교의 교류협력을 위해 진력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비’의 가르침을 널리 펼치는 데 헌신하고 있다. 현재 캐나다 맥길 대학 티베트 불교철학 부교수로 재직하며 고통의 시대를 이겨낼 핵심 가치로 자비 수행을 강조하고 이를 가르치고 있다.
출처 : 불교신문